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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 분자 동영상의 시대가 온다

초고속 분자 동영상의 시대가 온다
실험과 이론의 양 날개를 달다

     이한주, 하정현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서울센터 연구원, 조민행 고려대 화학과 교수

가끔 TV에서 ‘1000분의 1의 세계’라며 다큐멘터리 등에서 보여주는 영상이 있다. 총알이 물통을 뚫고 날아가는 장면이나 유리병이 깨지는 장면을 상세히 보여주어 찰나의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러한 영상들은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분자 세계를 연구할 때 찰나의 순간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순간을 포착하는 과학기술은 꾸준히 발전하여 지금은 ‘1000조분의 1초’의 순간까지도 포착해 내는 ‘펨토(femto) 과학’ 수준에 도달해 있다. 조만간 총알이 물통을 뚫는 시간과는 비교도 안 될 짧은 시간 동안에 분자가 일으키는 변화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초고속 생체동역학 연구에 필수다. 말의 움직임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게 한 이드위어드 머이브리지의 다중노출 사진작품처럼 펨토 초 레이저는 분자들이 매 순간 변화하는 모습을 분석할 수 있게 한다.1960년대 DNA의 이중나선구조가 규명된 후 이를 분자적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다방면으로 이루어졌다. 분자구조와 생명현상의 상호연관성을 연구하는 분자생물학이 태동하여 현재는 생물학의 핵심 분야로까지 자리잡았다. 생명현상이 분자적 수준에서 분석됨에 따라 생물학에서 물리학과 화학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 생체동력학 연구가 있다. 생명현상은 분자 수준으로 갈수록 상상을 초월할 만큼 동적이다. 아주 짧은 시간 영역에서 분자들의 구조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각종 생명현상이 일어난다.
생체동력학은 매우 빠르게 일어나는 생체 내 분자의 반응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초고속 생체동력학은 생체 메커니즘의 규명이라는 학문적 의미 뿐 아니라 타 생명과학 분야 및 제약 산업의 발전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중요성에도 국내의 관련 연구는 비교적 초보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서울센터)과 고려대학교 화학과(다차원분광학연구센터)의 연구팀이 공동 연구를 통해 획기적인 펨토 초 분광학 측정 및 계산 기술을 개발하여 그 연구결과를 2009년 3월 네이처지에 발표했다. 국내 초고속 생체동력학 연구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중요한 연구성과다.

● ‘펨토 초’(femtosecond), 생명현상을 좌우하는 극한의 시간 영역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은 날아오는 총알을 자유자재로 피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총알의 속도가 너무 빨라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 사람의 움직임이 총알에 비해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운동 경기에서 육중한 선수에 비해 작은 선수의 몸놀림이 더 빠르듯 속도는 대상의 크기에 대체로 반비례한다.
따라서 사람보다 훨씬 작은 나노미터 수준의 크기를 갖는 분자들의 움직임은 보통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극한의 시간, 즉 ‘펨토(femto) 초’ 단위 내에 일어난다. 여기서 펨토는 작은 양을 일컫는 단위로 1펨토 초는 1000조분의 1초(10-15초)를 말한다. 1초에 30만km를 움직인다는 빛조차도 고작 0.3마이크로미터 정도밖에 이동하지 못하는 아주 짧은 시간이다.
화학이나 생물학 반응에 수반되는 전자의 이동, 생체 내 효소에 분자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일, 광합성이 일어날 때 엽록소가 에너지를 전달하는 과정 등 생화학반응이 일어날 때 입자들의 움직임들이 바로 이런 극초단 시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사람이 인식하기 어려운 이 짧은 시간에 생명현상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자 단위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펨토 초(fs) 레이저 펄스가 사용된다.

● 펨토 초 레이저 분광학, 초고속 현상을 규명하는 열쇠

그렇다면 총알보다도 훨씬 느린 사람의 눈이 어떻게 펨토 초 동안 벌어지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펨토 초 레이저에 있다. 대략 수십 펨토 초 동안만 켜졌다 꺼지는 레이저 펄스(짧은 시간 동안만 켜지는 빛)를 분자에 쬐면 이 펄스는 펨토 초 시간 동안만 분자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아주 어두운 실험실 안에서 물체가 움직이는 동안 10초 간격으로 0.1초씩만 플래시를 터뜨려서 사진을 한 컷씩 찍는다고 생각해 보자. 플래시는 아주 짧은 순간만 켜지지만 이 사진들을 순서대로 모으면 10초 간격으로 물체가 변화한 모습과 그 과정을 분석할 수 있다. 펨토 초 레이저는 플래시와 같은 역할을 한다.
펄스를 연사하면서 얻는 자료들은 마치 영화필름의 프레임(frame)과 비슷하며 이를 충분히 느린 시간으로 본다면 결국 ‘초고속 분자 동영상’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주 작은 분자구조의 이미지를 현미경으로 보듯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레이저 펄스가 물체에 닿아 투과하거나 산란된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함으로써 그 구조적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런 학문 분야를 분광학이라 한다.
펨토 초 레이저를 이용한 분자구조 분석은 특별히 ‘다차원 분광법’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다차원 분광법은 이름 그대로 여러 개의 레이저 펄스를 분자에 쬐어 준후 산란하거나 투과한 광신호를 측정하여 입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체의 입체적인 모양을 파악할 때 정면도뿐 아니라 측면도와 입면도가 모두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된다.
연구팀이 이번에 개발한 방법은 펨토 초 다차원 분광법 중에서도 ‘광학활성 분광법’이라는 방법이다. 생체분자는 대부분 각각의 ‘광학이성질체’를 갖고 있다. 광학이성질체란 사람의 왼손과 오른손처럼 거울에 비춘 것과 같은 구조를 지니는 분자를 말한다. 오른손이 왼손의 광학이성질체인 셈이다.
젖산의 두 가지 광학이성질체. 구성성분은 같지만 좌우 대칭의 구조라서 서로 겹쳐지지 않고 빛의 편광방향이 다르다. 이 때문에 두 광학이성질체는 생체 내 화학반응에서 완전히 다른 물질처럼 행동한다.
두 개의 광학이성질체는 화학식이나 구성성분이 동일하지만 그 구조에 따라 화학적인 반응이 다르다. 특히 생명현상에서는 광학이성질체 중 어느 하나만 정상적인 반응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왼손과 오른손은 구성 성분이나 모양이 비슷하지만 구조가 반대이기 때문에 서로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광학활성분광법은 두 광학이성질체가 빛이 투과했을 때 편광(빛이 진행할 때 특정한 방향으로만 진동하는 현상)되는 방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으로 생체 분자의 구조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편광 신호가 극히 미세하여 기존 방법으로는 시간에 따른 분석이 쉽지 않았다.
이번에 개발한 교차편광-간섭광학계 분광장치는 극미세 광학활성 신호를 선택적으로 증폭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더 나아가 펨토 초 레이저를 이용하기 때문에 초고속 측정 역시 가능하여 생체 분자의 변화를 분석하는 데 최적의 방법이다.
새로운 분광법은 화학과 생물학에 다방면으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과학 전반에 매우 중요하다. 생명활동 분석에 최적화된 방법이기 때문에 산업계에도 그 파급효과가 대단히 클 것이다.
특히 의료 기술이나 신약 개발과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국내 생물학과 화학 발전을 위해 펨토 초 레이저 분광학 연구를 시작으로 다양한 분석도구가 개발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주목이 더욱 필요하다.

 

화학반응은 ps(피코초·1ps는 1조분의 1초) 단위로 일어날 만큼 매우 속도가 빠르다. 영국 브리스톨대 앤드류 오잉 교수팀은 이 짧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전자 빔을 1ps 간격으로 용액 시료에 쏜 뒤 통과한 빛의 특성을 분석했다. 용액 시료 속에는 탄소와 수소로 구성된 ‘사이클로헥산’이라는 물질이 들어있었다.
분석 결과 연구진은 용액 속에 들어 있는 탄소-수소 덩어리가 사이클로헥산에서 수소를 가져와 새로운 화합결합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잉 교수는 “불과 1조분의 1초 만에 새로운 화합물이 만들어졌다”며 “분자의 화학반응 과정을 단계별로 정확히 포착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