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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칠맛   ▷ ........


MSG정미료, 역할, , 논란

MSG 미원(대상) 창업주 이야기

출처 : 딴지일보 2014. 07. 01. 화요일
         메이비 http://market.ddanzi.com/?mid=ddanziNews&document_srl=2590461

삼성이 마음먹고 융단폭격 까서 못잡은 유일한 기업.
정, 관계와 폭력조직까지 동원해도 못이긴 유일한 사업분야.
야만의 시대, 이기면 장땡이던 시절이라 삼성한테 한참 유리했는데, 새로운 부문에 진출해서 기존 업체에 대한 상도덕 무시하기 스킬에 일본 기업과의 제휴를 통해 토종 기업들을 거침 없이 물 먹이기까지 할 줄 알았던 그 삼성이 원조 미원집인 일본의 기술까지 들여왔는데도 깨졌어. 그건 아마 이 기업의 철벽 같은 수비 덕분인지 모르겠어.
1982년 <재벌25시>에서 언급한 두 번째 그룹은 미원이야.
당시 회장은 창업자인 임대홍 씨였어. 그에 대한 1982년 조선일보 경제부의 평가는 이러해.

"한국의 하워드 휴즈"



사실 이 제목에는, "조까, 취재따윈 응하지 않는다!" 라는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한 반발이 담겨있어. 창업주 임대홍씨는 인터뷰를 안 하는 것은 물론 몇몇 필수적인 정보에 들이미는 명합사진류 외엔 거의 얼굴이 알려진 바도 없었고, 심지어 같은 재벌회장끼리도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없다는 기이한 소문의 주인공이었어. 해서 기업 사이즈만 보면 하워드 휴즈의 구두 뒤꿈치 정도였음에도 그에게 비견한 것 같아.
어쩌면 이런 심가한 낮가림과 정계와의 인연거부로 신규사업 진출을 블록킹 당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을정도로, 명색이 그룹이었던 미원은 계열사 숫자도 얼마 안 되며 벌어둔 돈에 비해 쉽게 정경유착을 통해 불하 받을 수 있던 알짜 국영기업 나눠먹기 잔치에도 이름을 올린 바가 없어.

과연 얼마나 철벽이었는지, 써머리 들어가 보자구.

시작하자마자 아무도 모르고 마주한 적 없다는, 기묘한 이야기가 2페이지에 걸쳐 주루룩 나와. 심지어 직원들에게 말 거는 것도 싫어하고 비서실에서도 회장실 문을 열어보고 퇴근을 인지할 정도였다고 해. 이거 뭐 007도 아닌데 말이지.
어느 정도였냐하면, 밖에 나가기 싫어 양복과 구두를 맞춰본 적이 없다는 진술도 있어. 당시는 기성복 수준이 워낙 열등해서 맞춰입지 않고는 모임에 나가 폼잡지 못했는데 말이야. 서로 바짓단까서 원단이 어디 것인지로 우월감을 과시하던 시절임을 상기하면 "뭔 재벌이 이래?" 하는 반문이 자연스레 터져나오지. 임대홍 씨는 그냥 출근길이나 외출하는 도중 불쑥 차 세우고 기성복점에 들어가 사입고 나오는 충동구매 취향에다 구두 또한 길거리 행상들이 파는 싸구려를 즐겼대.
사사 발행마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게 싫다며 발행 중지를 시켰다는 일화에다가 해외 기업소개용 브로셔에 사진을 넣어야 한다는 직원에게 "니 사진이나 처넣으셈!" 했다는 전설적 히끼꼬모리.
유신 직전 김대중 씨와의 마지막 선거를 치른 1971년의 다까끼 마사오 씨에게 야당에 정치자금을 댄다는 의심을 받아서 수개월에 걸친 정밀 세무조사를 받고 추징금을 맞은 것도 모자라 어이없는 박해를, 이후 6년 동안 매년 세무조사라는 형식을 통해 받았음에도 전혀 소명활동이나 정치자금공여 등, 적극적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 이쯤 되면 그냥 철벽남이 아니라 그 시대의 돈키호테 정도로 격상시켜줘도 되려나?
국세청에서 노골적으로 "당신네 회장은 어떤 사람이냐?"라며 자기들 앞에 나타나 싸바싸바하기를 요구할 때 "좆까,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용서를 구해야함?"이라는 한결같은 대꾸로 절충하라 조언하던 주변 지인들을 울화병에 수명 감퇴 시켜줬다는 일화.
이웃이었던 정계의 거물이자 기업인 김성곤(쌍용창업주)씨와도 주변에선 "친하게 지내면 좋을 거임."하며 친목질을 도모하라고 꼬드겼음에도 김성곤씨 관짜는 그날까지 얼굴 한번 본 적이 없다고 해.

이후로도 정치권의 몇 번에 걸친 프로포즈에 한결같은 '좆까'정신으로 일관했어.

그런 성격이다보니 고향사람, 친구, 친척, 학교선후배 등등의 연고자 중심의 채용 철학을 가졌던 것도 이해가 가. 이런 자기 성격을 스스로 말한 적이 있다는데, 전문을 옮기자면 다음과 같아.
"난 직원을 채용할 때 능력은 부족해도 믿음성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들은 배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내 일가친척, 친지들이 아니겠는가? 나는 기업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데 재미를 느끼거나 거부가 되겠다는 야망을 가져본 적은 없다. 그것을 나는 나의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吾道一以貫之(오도일이관지) 나의 길을 간다. 이런 글을 회장실 벽에 걸어놓고 사신 양반이었대.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거의 연금술사 등급의 실험광이었다고 쓰여 있어. 자폐적이다보니 뭔가 실험하고 만들고 맛보기를 즐기게 된 것 같아. 회사와 집에 각각 개인 실험실을 뒀고 채용에서도 경영 분야 직원보다는 기술자 분야 직원들을 더 반겨했을 정도로. 정말, 실험덕후에 은둔지향인 거 보니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가관이었겠어.
직접 확인해보지 않은 상품은 내놓지 않았다고 해. 유일한 예외가 제조해서 병입한 코카콜라 뿐이었다고 하는군. 미원을 개발할 때도 기술비용 1억엔을 일본 쪽에서 요구하는 바람에 "좆까! 내가 만든다" 그러면서 딱 1백일 동안 혼자 실험실에서 개발한 전력이 있다더라. 역시 고수들은 홀로 존재하나 봐. 동굴하나 차지하고 들어앉아 절세신공을 창안한건가?
미원을 만들기 전에도 피형 제조기술을 오폐수 먹어보며 연구해서 한 때 피혁공장으로도 돈을 제법 벌었다고 하니깐. 아, 이거 정말 무협지다.

미원제조 설비를 설계한 것도 회장 자신이라고 하니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천재 혹은 독한 미치광이 과학자쯤인가 봐. 염산에 부식되지 않는 미원제조 설비를 직접 개발했다는데 이걸 믿어야 할까?
밥짓기 실패한 며느리 불러다가 밥짓는 법을 데이터로 남기며 실험해보라고 과제도 내줬대. 부인에겐 가장 빠르고 낭비없는 빨래 기술을 연구하라고 했다는데 그럴 법도 한 것이 일본 출장사무소 직원 숙소엔 섭생법, 김치 담그는 법, 세탁법, 청소법, 김치 담그고 며칠 지나야 맛있는지에 대한 데이터 등이 방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해.
예전에 마사오 씨 죽은 후 다 해어진 구두, 낡은 허리띠, 고쳐입은 양복... 사람들이 뭐 이런 거 얘기했잖아. 그런데 미원 창업자 임대홍 씨는 일단 평생 통틀어 양복 세 벌, 구두 두 켤레 이상을 소유했던 시간이 없대. 못 쓰게 되면 신규 구매를 하지만 동시 소유 숫자가 저렇다는 거지.
가장 즐겨 먹던 게 남대문 시장통 안에서 파는 설렁탕이고 바쁠 땐 회장실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재벌이라니. 어째 피시방 폐인과 오버랩이 자꾸 되냐.
골프장은 한 번 가고 "분수에 맞지 않다" 일갈하며 단념하고 회갑잔치 준비하는 가족에게 반발하며 가출, 죽는 날까지 출퇴근은 주로 버스를 이용했어. 그래서 아침마다 부인이 양복주머니에 토큰 두 개를 넣어줬다지. 전용차가 있음에도 차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가 실험을 하다 보면 6시를 넘기는데 6시 넘은 건 근무시간이 아니라고 회장차 이용을 안했대. 기사양반 칼퇴시켰다는 소리야.
임원들이 과잉충성으로 코티나를 타던 임회장에게 벤츠를 사서 떡~하니 주차장에 뒀는데 한참을 그 앞에서 차를 보던 임회장은 "도저히 내가 탈 수 없는 차로군" 하고 회장실로 짱 박혔대. 결국 벤츠는 환불했다고 하네.
혼자만 이런 게 아니라 가족들에게 같은 수준의 검소정신을 요구했는데, "나만 사치하고 잘사는 것은 죄악, 돈 많은 아버지를 둔 것을 미안하고 송구스럽게 생각하라"는 도무지 나조차도 이해 안 되는 안빈낙도의 세계관 소유자였어.
식사 중 밥알만 떨어뜨려도 농부의 프로세스를 설명하며 혼냈고 애들에게 자가용도 태워주지 않았대. 뭐, 이 정도는 동시대 일반적인 가정교육이자 훈육법이었는데 그 뒤로 2대 회장이 될 임창욱 씨를 갈군 내용들이 주루룩 나와. 특히 금연하겠다고 뻥카쳤던 아들의 금연실패에 대한 응징이야기. "너처럼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아들을 둔 것이 내 살을 찌르르 것보다 아프다" 며 송곳으로 자신의 팔뚝을 자해해서 아들이 담배를 끊도록 만들었대.

1세대 기업인의 설명엔 별 수 없는 것일지, 만능 고수야. 독공이면 독공, 신법이면 신법, 장풍도 필수고, 검법으로 창법을 만들기도 하는 실험의 제왕, 검소함에 독한 자기 절제까지. 그리고 여기에 판매의 귀재였다는 전설도 추가되어 있어.

1969년부터 벌어진 1차 조미료 대란. 삼성의 미풍, 신한제분의 맛나니 등 4개 제품군의 시장 수위를 두고 붙은 전쟁이었어.

미원을 잠재우기 위해 삼성을 필두로 한 얼라이언스 4개 브랜드의 전략은 외상판매, 덤핑행사를 통해 미원을 압박해. 미원도 대응해서 같은 전략을 구사했어. 미원은 이게 당연히 각자도생인 줄 알고 묻었는데 알고 보니 미원 잡겠다고 삼성이 벌인 총력전이었네. 결국 미원은 실탄 부족으로 도산위기에 처해. 이때 임회장의 선택.

- 현금 결제만 받아!
- 값 확 올려!

중역들은 아연실색했지. 외상거래로도 밀리는데 현금만 받고 팔라니. 거기다 지금 저가에서도 힘든데 가격을 올리라니.

'저거 미친 거 아닐까?'
'방구석에서 뭘 처먹은 거냐?'
'버서커주스를 먹었을거야.'
라는 생각이었겠지.

"망해도 내가 망한다. 돌격! 쥐뿔 주식도 없는 것들이..."
중역을 상대로 한 임회장의 설득전이 시작됐어.

"일반소비자는 외상으로 사지 않는다. 현재의 체제는 중간도매상의 이익일 뿐. 터무니없이 고가는 아니고 경쟁사보다 우위의 가격을 선택하는 것은 이런 아사리판에서의 차별화 전략이다. 대신 물건을 더 잘 만들면 된다."
비싼 게 좋은 거라는 상식이 있던 시대니깐. 그의 차분한 설명을 들으면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었을 거야. 이 결단을 기점으로 미원은 승리를 얻고 경쟁사는 맛이 훅 가게 돼.
왕창 빨린 경쟁사들이 전열을 정비해서 또 터진 2차전쟁은 1977년에 일어났어. 이 때는 핵산조미료의 시대였는데, 미풍(삼성)은 빠른 기술전수를 일본으로부터 받은 터라 살짝 판촉만 성공하면 미원을 드디어 씹어먹겠다 싶었지.
자본 우위, 기술 우위, 광고 당연히 우위였던 삼성 쪽에 반해 미원 쪽에선 삼성의 터지는 자신감을 감지해서 "무언가가 있군"하는 대기상태에 돌입하지.
이후 벌어지는 광고전은 만화 '시마과장'에 비견할 만한 내용이야. 인쇄소와 상대편 광고기획사 매수를 통한 포스터 빼돌리기와 선제 공격으로 준비 많이 한 상대편이 역으로 털리는 식의 극적인 에피소드가 실제로 일어난 거야.

10만명 대상의 경품쑈를 캐치한 미원은 이틀 전 계획의 전모를 파악하고 동시에 같은 날 맞불작전을 이틀만에 수립하지. 승부를 가른 건 캐시미어와 금반지의 대결이었어. 삼성은 아주머니들의 감성을 공격해 털스웨터를 상품으로 걸고 미원은 실리적인 선물을 골라 원가 면에서 오히려 털스웨터보다 저렴한 1푼짜리 금반지를 경품으로 선택해. 당연히 오래준비한 애들이야 털스웨터 물량 잡고 고민할 시간이 있다지만. 급하게 따라가는 쪽은 현찰과 그에 준하는 금반지가 준비하기 수월했던 것도 이유였어. 때문에 미원의 승리는 원가상으로 더 저렴한 선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어.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며 그날 일간지와 각종 매체의 광고를 기획하고 '자, 우리의 핵펀치를 보아라~ 이러는데' 경쟁사 광고가 거의 비슷하게 같은 물량 같은 채널링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해 봐. 아마 당시 판촉전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한 놈은 엄청 처맞고 잘렸을거 같아.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사람이 해고되고 미원 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승진하고 결과에 따라 그런 희비도 엇갈렸다는군. 이 일화를 영화로 풀어먹은 게 안성기씨 주연의 '성공시대'야. (재미있는 영화니깐 딴지스들 꼭 보도록.)



기업 2-3개 말아먹어도 좋으니 미원을 제껴라! 며 삼성의 창업주가 일갈했다던 카더라 통신을 남기고 미원은 승자로 기록되어 남은 거야. 이렇게만 끝났다면 방안퉁수요, 작은 일화로서 끝나겠지만 판매의 귀재라는 외호가 생긴 이유의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어. 미원이라는 한문이름의 원조격인 아지노모도를 같은 이름으로 꺾겠다는 기묘한 발상으로 동남아 각지에서 경쟁을 펼치며 맞승부를 펼쳤다는 것. 1980년대의 기업치고 일본기업과 경쟁을 한다는 건, 더구나 그 상대가 해당 사업분야의 원조격인 경우는 그 사례가 없지. 그런 걸 동남아와 남미를 포함한 전 세계 시장에서 했다니 참, 특이하다 아니할 수 없는 창업주의 모습이야.
다만 라이벌 업체의 판촉 전술에 허를 찌르는 술수를 남발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고 흑색선전을 해서 상대를 깎아내렸다는 이야기도 나오네. 역시 야만의 시대에 삼성을 상대로 이긴 기업답게 정도와 사도를 넘나드는 필살기도 구사했나봐.

자, 써머리는 여기까지. 삼성의 페이지에 비하면 절반조차 안되는 짧은 소개였어. 창업주의 사교성없는 태도와 행실때문에 공개된 사실도 적고 결국 무협지적 특성을 가진 여러 전설적인 일화만 말하다보니 분량도 작어. 게다가 미원그룹이라 부르기엔 미원 빼고는 계열사들의 인지도가 확 떨어진다는 점도 크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을 이겼다는 이유 하나로 삼성을 소개한 바로 다음에 미원을 배치한 게 조선일보의 선택이었어.

이겨보고 싶다는 선대의 소원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못 이기는 존재의 유전자가 갖고 싶었기 때문인지, 훗날 삼성이 사돈으로 삼아(못 가져본 것을 유전 계보에 남기는 삼성의 집념은 참 대단해.) 자기 4대손의 피에 미원이 흐르게 만든 상대.

그러나 삼성을 막아낸 기업치곤 2대 이후로 선장도 빈약하고 크게 일어서지 못한 채 그저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그 중에서도 전근대적인 모습인 채로 남겨져 있는 구시대 재벌.
현재는 미미한 규모인 대상그룹의 전신이었던, 그래서 어쩌면 창업주에게 단 한 세대에 발현된 돌연변이적 천재성, 혹은 은둔지향을 볼 때 일종의 자폐증버프를 통한 특이능력 발현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 범상치 않은 회사.
이런 이야기들 말미에 참 훈훈한 건... 창업주가 이런 인간같지 않은 삶을 산 이유는 결국 자식들의 훈육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야. 자식교육을 위한 노력은 재벌이나 일반인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는 게 그래도 좀 따스하네.
이런 선대의 태도를 견지했다면 좋았을 텐데.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늘 가르친대로 살아가지를 않지. 청교도적 기독교인이던 창업주는 허욕없이, 명분과 합리적인 방법을 거치지 않은 재산을 형성해선 안된다, 라는 철칙을 평생 지키려고 노력한 반면 그 후대는 그렇지 못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인에 야당과 연루되었다는 심증만으로 1970년대 전체를 세무조사와 갈굼으로 경쟁자 삼성의 모든 것을 동원한 압박에 시달려온 기업임에도 상처입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미원은 대단한 기업이라 평가해줄 수 있는 것 같아.
이것이 미원의 1982년. 그런 의미에서 칭찬과 비판도 각잡고 해볼게.
한국 재벌의 1세대는 참 다양하고 독특한 타입의, 강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아. 이후 2세대에서 지들끼리 7공자네, 뭐네, 어울려다니며 비슷비슷한 찐따스타일을 구축해서일지 1세대들의 개성은 더욱 돋보이지. 그런점에서 미원그룹의 창업주인 임대홍 씨는 내가 궁금해 마지않는 사람이야.

'일정 부를 이룬 시점에서의 만족과 자족'을 몸소 실행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만족하며 경쟁자에게 맨 등을 내주는 사람도 아닌 철저히 자기 영역을 지키며, 싸움이 벌어질 땐 물고 늘어지다가 반드시 승리하는 똥개 타입의 경제인이야. 자기 영역 내에서 승률은 일단 50% 깔고 가니깐.

내가 씀씀이를 광활하게 넓히다가 병을 얻고 필리핀으로 요양을 와서 대학시절 수준 이하로 씀씀이를 줄여본 결과 고통스럽지만 줄여서 얻는 감정이란 건 있더라고. 세상에 얽매이는 것을 최소화할 때 얻는 자유랄까? 같은 목적이거나 같은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겠지만 월급중독자로 15년쯤 살아보니 월급이 끊긴 금단증상을 극복하는데 어마무지할만큼 힘들었거든. 해서 세상에서 얽매이는 것들을 줄여가면 그 필수적인 것들을 제외하곤 과감히 무시할 수 있는 검소한 생활을 하면 어지간한 유혹엔 잘 빠져들지 않게 된다고. 재벌들의 검소는 어떤 목적이고 무엇을 얻어서일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을 움직이는 사람이 자본에 얽매이는 게 적다면 분명 장점이 될 거라고 생각은 해.

미원그룹이 당대의 No.1의 저주어린 투기를 받아넘기면서도 버틸 수 있던건 명예욕 없음, 낭비벽 없음, 어설픈 양보 없음의 3무 정신이 주효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어. 미원그룹의 장점은 이런 창업주 덕에 사회적 물의 없이, 오너의 방탕함 없이 건실하게 운영되었다는 측면에 있고 친, 인척 경영의 장점인 초반 신뢰구축에 필요한 시간이 단축되면서 얻는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는 조직력 등에도 어느 정도 점수를 줄 수 있겠지. 그리고 먹는 것과 관계된 주력 상품 덕에 늘 꾸준한 시장을 쥐고 있던 것 정도랄까.

손에 피묻히지 않고 자란 회사라는 점도 장점이겠지. 공정이 위험하거나 한 건 아니었는지 인사사고의 예도 찾아보기 쉽지 않아. 중동붐을 타지도 않았고 월남 특수도 멀리 있었던 것 치고 그 목숨 팔아 돈 버는 찬스를 멀리하고도 이정도 위치까지 커진 회사가 드무니깐.

대충 1970년대 재벌 순위를 알기 쉽게 볼 수 있는 기사가 하나 있어서 링크할게.

대한석유공사 유재흥 사장이 1억2000만원을 냈고,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동명목재 강석진 사장, 연합철강 권철현 대표이사, 김한수 한일합섬 사장, 대농그룹 박용학 회장, 호남정유 구평회 사장, 동국제강 장상태 사장, 미원그룹 임대홍 회장이 각각 1억원씩을 냈다. 중간 계열의 그룹은 5000만원을 기탁했다. 동아그룹 최준문 회장, 동양정밀 박율선 사장,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 김상홍 삼양사 사장, 동양맥주주식회사 정수창 사장, 김창원 GM코리아 자동차주식회사 사장, 럭키그룹 구자경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일신산업 주창균 사장, 대성목재 최우직 사장,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 박병권 대표가 각각 5000만원을 냈다.
이 다음 수준의 그룹은 3000만원을 냈다. 한국화약 김종희 회장, 대한전선 설원량 사장, 대우실업 김우중 회장,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 최태섭 사장, 한국제지 단사천 회장, 조양상선주식회사 박남규 사장, 진로주조주식회사 장학엽 사장, 롯데그룹 유창순 회장, 풍한산업 김영구 사장, 태광산업 이임용 사장, 신동아그룹 최성모 회장이 각각 3000만원을 기탁했다.

선경그룹과 해태그룹 같은 경우는 1974년 기사에는 나오지 않지만 1975년 방위성금으로 각각 1억원을 내, 당시 재계 서열에서 상위에 올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주간경향

이 기사를 보면 1974년 당시엔 미원이 현대보다도 성금 단위가 큰 회사였지. 창업주가 손바닥을 비비는 타입이거나 정치권에 정치자금 팍팍 뿌려댄 사람이었다면 이 순위만 지켰어도 아마 1982년 기준 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선경만큼은 컸겠지. 비슷한 화학기반의 업종에 외형도 비슷비슷이었으니.
1982년 기준 임대홍 회장의 미원그룹은 빨아줄 부분이 명확해. 명예를 위한 무리한 짓을 하지도 않고 지나친 물욕 때문에 남의 눈에 피눈물 짜는 타입도 아닌 점. 그러면서도 실력 면에서 출중하여 직원을 잘 둬서 당대 1등 삼성그룹을 몇차례 대파하여 이병철 씨의 머리혈관 돌출에 기여한 점. 게다가 생활습관이나 삶의 태도가 자신이 세운 원칙과 욕망에 충실했고 남에게 휘둘리지도 않았다는 점. 끝끝내 1대로 마무리되었지만 창업주의 특이한 이력 역시.(이후 아들이 물려받으며 신문에 오르내리는 일도 많고 손자 대에 이르러 손녀때문에 더더욱 매스컴 타는 일도 많지만 일단 이 글은 1982년 시점까지의 일로 말하는 거니깐.)

한국음식 맛의 평준화를 이룬 '미원'의 개발자이자 창업주로서 임대홍 씨의 영향은 매우 크지. 모든 집에서 끊어내기 어려운 MSG 청산 작업을 하고 있다지만 향후 20년쯤은 더 그 친숙한 맛이 한반도 전역에 남아 있지 않을까.

바쁜 시대 육수 따로 만드는 시간을 절약케해서 더 빠른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숨겨진 맛으로 대변할 수 있는 미원처럼. 한 시대에 굳이 정경유착에 얽매이지 않고 사교적이지 않으며 매스컴과 친하지 않아도 기업을 성공시켰던, 1982년 시점에선 꽤 불가능한 캐릭터. 그 이름을 기억할 의미로 이쯤이면 충분치 않을까?


칭찬은 이쯤하고 깔 걸 찾아볼게.

어쩐지 첫 빠따로 삼성이 지나가버린 이후 나머지 기업들 페이지가 줄어든 탓에 쓸 이야기가 적은 느낌이 없지 않아. 하지만 무협지 상으로 볼 때 미원그룹의 창업주인 임대홍씨는 괴이하며 음습한 부류로 분류가 될 텐데, 이런 비주류적 특성의 고수에게 당대 3천왕급의 절대고수인 이병철씨가 판판이 비무에 진 것은 아무리 초식의 제한과 사용할 무공의 폭을 독공으로 한정지었다 해도 대단히 신기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써볼 수 있겠어.
실험적인 생활에 모든 걸 분석하고 계량하며 제조 원리를 알아야 하는 임대홍 창업주는 무협지 장르 중 괴이독랄하다며 자주 언급되는 사천당가 이야기와 비슷한 뉘앙스야. 미원도 기술 이전 비용이 아까워서 직접 개발하고, 피혁 가공 기술도 폐수 마셔가며 직접 제조법을 득한다는 것은... 글쎄, 잎사귀 한 장 깔고 강물을 건넌 달마에 비교해야 하나?
여튼 요즘 시대엔, 경영자가 이런 짓을 한다면 미친사람 취급당하기 딱이었겠지. 한국 기업사회의 초창기라 할지라도 사람 만나기 싫어하고, 은둔자적이며 독고다이형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한 시대의 주요 대기업 군에 속한 기업을 일궈낸 것도 희한하고.
지금까지 3세로 이어져가는 마당에 몰락하거나 하지 않은 것도 신기해. 참모진과 인재의 명확한 세팅으로 버텨온 타 기업에 비해 인재에 대한 투자나 발굴을 그다지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할, 온정주의가 가득 담겨 있는 기업인데.
이런 희한한 기업 미원에 대해 실망하게 된 시기는 머리가 커서 해외에 나오면서부터야. 1990년대까지의 각종 매스컴에서 거의 소설이나 SF급으로 덧칠을 해준 내용과 달리 패키지 디자인부터 맛과 성분까지 100% 베낀 그런 브랜드들을 가진 대기업이란 존재가 한국의 대표기업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던 무렵이지.

일본의 이자노모도와 싱크로율이 98%쯤 되더군. 애초 이 미원의 개발자 자체가 일본인이란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상품화를 해서 동남아 진출을 할 거였으면, 브랜드라도 구분이 되게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일본애들이 드러내지 않고 비웃는 요소인 한국의 모든 대기업의 일본 모방 역사. 그 역사는 현재진행형이야. 아직도 서로 금칠하며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기업이 많지. 어느 시점까지 그럴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면 적어도 한국 스스로가 개도국을 벗은 이후라도 그 짓을 멈췄어야하는데, 전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리고 1982년까지라지만 여전히 삼성과 함께 공통적으로 가진 단점은 2세를 교육함에 있어 1세대가 가진 장점을 물려주질 못했고, 더불어 1세대가 가졌던 단점을 더 확장시켜서 물려줬다는 점이지.
임대홍 회장의 기록은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재벌25시>라는 조선일보사의 책엔 다소 과장되고 허풍스러운, 서로 금칠해주기 시대에 나온 책답게 정확한 역사를 담고 있지는 않아. 조금 가십들을 모아둔 느낌도 있고. 오히려 지금 기준이라면 '다음 오픈지식'의 기록이 더 명확해. 아마도 요즘 시대에 사사를 쓴다면 '다음 오픈지식' 내용과 같이 정리가 되는 게 현실성이 있겠지.
지나치게 검소했고 정치적인 핍박을 뚫고 성공을 했으며 그럼에도 부자로서의 처신과 스스로 세운 도덕률을 넘어서지 않은 독특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해 보여. 다른 기록에도 이견이 없는 걸 보면.

깔 게 크게 없네.

1982년도까지의 기록이 부실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11살까지의 기억이래봐야 어린 애의 눈에 뭔들 날카롭게 정리할 수 있겠어. 그런 한계점이 있는 거고. 여튼 뭔가 까볼려고 이리저리 자료 뒤지다 감탄만 따블이네.
단풍의 계절에 니들이 1번국도를 통해 내장산을 간다면 임대홍 창업자의 선물을 보게 될 거야. 500그루의 단풍나무. 일찍이 내가 태어나던 해에도 장학재단을 만든 사람이고. 에휴, 멋져라. 어이쿠야. 인물이네.
브랜드 모방의 흔적이 깊었던 일과 폐쇄적인 친인척 동향사람 우선 채용정책 등은 비판받을 수 있겠지. 당대의 대기업으로서 했을 일로 어울리는 것 같진 않거든.
아직까지 장수하시는 중인데 1세대 재벌 창업주 중 아마도 드물게 생존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돼. 가계도도 복잡하지 않고, 달리 호색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어. 근면 검소, 실험광의 집념이 그 수명을 길게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한국의 당대 연금술사 같은 미원그룹, 이제는 대상그룹 창업주의 1982년도까지의 기록을 보고 느낀 것들이야. 비판은 미세하고 감탄은 장황했지만 그 시대의 기업들 이야기란 내겐 무협지 같은 비현실성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서 환경적으로 현재 필리핀과 동급의 부패정도를 지녔던 그 시대에 기업을 한다는 건 어떤 판타지 소설 같은 느낌일지 감도 안 잡혀.1986년까지 작은 기업까지 돌며 정치자금을 긁어댄 민정당이란 곳이 있었고, 3천만 원 가져가고 시계 하나 던져준 게 다인 그 '보통 사람'은 13대 대통령이 되었지. 보안대의 각 분견대까지도 선거운동에 투입하고 매주 재야인사 및 '반정부세력'이라 이름 붙인 야당 관련 인사들의 동향보고를 받는 게 일상이던 시절에, 그 시절도 사뭇 골때렸는데 하물며 그 이전의 전씨 독점주의 시대에 말이지. 그런 시대에 대한 감탄과 대기업의 활약상에 금칠을 더한 이 책을 처음 읽던 내 중학교 시절의 기억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서... 아마도 난 이 책에 대한 글을 다 쓰면 성장 후 쌓인 비판의식과 대기업에 대한 판단력이 사라져버릴 것 같아. 주먹낭만주의를 기술하는 야인시대 같은 느낌이네. 가까이 보는 조폭은 거칠고 쓸데없고 후레자식인데, 이야기와 금칠된 그들만의 역사속에선 협객이라 부르듯이 말이지.

어쨌든 기다리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아도 좋을, 그저 옛 책을 다시 읽으며 느낀 글을 계속 정리하는 정도의 연재로 생각해줘. 다음 편부턴 분리하지 않고 한 편에 몰아 넣어 쓸 거야. 내가 괜히 이글을 그냥불패에 쓰는 게 아니거든. 이유없이 그냥.
서로를 금칠하며 작은 성취에 위안했던 시대의 책. 그런 기업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본 마흔 넘은 까칠한 남자의 그리움이 담긴 시선쯤. 그냥 쓰는 거지.